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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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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규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
한용운 - 슬픔의 삼매(三昧) 하늘의 푸른빛과 같이 깨끗한 죽음은 군동(群動)을 정화(淨化)합니다 허무의 빛인 고요한 밤은 대지에 군림하였습니다. 힘없는 촛불 아래에 사리뜨리고 외로이 누워 있는 오오, 님이여! 눈물의 바다에 꽃배를 띄웠습니다 꽃배는 님을 싣고 소리도 없이 가라앉았습니다 나는 슬픔의 삼매(三昧)에 '아공'(我空)이 되었습니다. 꽃향기의 무르녹은 안개에 취하여 청춘의 광야에 비틀걸음치는 미인이여! 죽음을 기러기 털보다도 가볍게 여기고, 가슴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얼음처럼 마시는 사랑의 광인(狂人)이여! 아아, 사랑에 병들어 자기의 사랑에게 자살을 권고하는 사랑의 실패자여! 그대의 만족한 사랑을 받기 위하여 나의 팔에 안겨요 나의 팔은 그대의 사랑의 분신인 줄을 그대는 왜 모르셔요
황지우 - 수은등 아래 벚꽃 사직공원(社稷公園) 비탈길 벚꽃이 필 때면 나는 아팠다 견디기 위해 도취했다 피안(彼岸)에서 이쪽으로 터져 나온 꽃들이 수은등을 받고 있을 때 그 아래에선 어떤 죄악도 아름다워 아무나 붙잡고 입 맞추고 싶고 깬 소주병으로 긋고 싶은 봄밤이었다 사춘기 때 수음(手淫) 직후의 그 죽어버리고 싶은 죄의식처럼 그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던 죄처럼 벚꽃이 추악하게 다 졌을 때 나는 나의 생(生)이 이렇게 될 줄 그때 이미 다 알았다 이제는 그 살의의 빛 그 죄마저 부럽고 그립다 이젠 나를 떠나라고 말한 오직 축하해주고 싶은 늦은 사랑을 바래다주고 오는 길에서 나는 비로소 이번 생(生)을 눈부시게 했던 벚꽃들 사이 수은등을 올려다본다
어린 게의 죽음 -김광규 어미를 따라 붙잡힌 어린 게 한 마리 큰 게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할 때 게 장수의 구럭을 빠져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개펄에서 숨바꼭질하던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눈을 세워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 1979 문학과 지성사,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
병(病) -고은 아픔이 늘 떠나지를 않는다 뼈마디 속에 숨어서 살을 우빈다 바람 불고 비 내리는 날 거들 난 몸뚱이에 남은 거라곤 이것뿐이다 안에서 밖으로 내쏘는 극기(克己)의 화살!
서울의 달 -고혁 는개 철철 내리는 밤 한강 다리 악을 쓰는 자동차 행렬에 쫓기듯 웅크린 채 떠밀려 가는 사내 용산역 대합실도 지나버렸고, 이제 갈 곳이 없다. 텅 빈 뱃속 어지러운 머리 어디 잠재 울 구석이 없다. 한 많은 청춘 더럽게 날렸다 좋다고 서울 와서 있는 힘 없는 자랑 죄다 빼앗기고 땀내 나는 그림자마저 전깃불 빛에 먹혔다 간다, 누더기뿐인 몸뚱이 하나 갈가리 찢긴 가슴을 안고 아무 소리 않고 다리 위를 간다 비칠비칠 뻘건 살덩어리 간다 사내야, 앞도 안 보고 가는 사내야 내일 또 다시 이 길로 돌아올 거냐 네 뒤에 부끄러이 가는 나는 함부로 말 붙일 수도 없다 다리 아래, 함께 건너는 이 다리 아래 시꺼먼 물 도도히 떠내려가고 물귀신 떼처럼 서울이 비쳐 보인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눈 오는 날의 미사 -마종기 하늘에 사는 흰옷 입은 하느님과 그 아들의 순한 입김과 내게는 아직도 느껴지다 말다 하는 하느님의 혼까지 함께 섞여서 겨울 아침 한정 없이 눈이 되어 내린다 그 눈송이 받아 입술을 적신다 가장 아름다운 모형의 물이 오래 비어 있던 나를 채운다 사방에 에워싸는 하느님의 체온 땅에까지 내려오는 겸손한 무너짐 눈 내리는 아침은 희고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