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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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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Ke..
겨울 강가에서 - 김경미 눈과 함께 쏟아지는 저 송곳니들의 말을 잘 들어두거라 딸아 언 강 밑을 흐르며 모진 바위 둥글리는 저 물살도 네 가슴 가장 여린 살결에 깊이 옮겨두거라 손발 없는 물고기들이 지느러미 하나로도 어떻게 길을 내는지 딸아 기다림은 이제 행복이 아니니 오지 않는 것은 가서 가져와야 하고 빼앗긴 것들이 제 발로 돌아오는 법이란 없으니 네가 몸소 가지러 갈 때 이 세상에 닿지 않는 곳이란 없으리 -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쓰랴? 1989년
마종기 - 눈 오는 날의 미사 하늘에 사는 흰옷 입은 하느님과 그 아들의 순한 입김과 내게는 아직도 느껴지다 말다 하는 하느님의 혼까지 함께 섞여서 겨울 아침 한정 없이 눈이 되어 내린다 그 눈송이 받아 입술을 적신다 가장 아름다운 모형의 물이 오래 비어 있던 나를 채운다 사방에 에워싸는 하느님의 체온 땅에까지 내려오는 겸손한 무너짐 눈 내리는 아침은 희고 따뜻하다
피천득 - 나의 사랑하는 생활 나는 우선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지금 돈으로 한 오만 원쯤 생기기도 하는 생활을 사랑한다. 그러면은 그 돈으로 청량리 위생 병원에 낡은 몸을 입원시키고 싶다. 나는 깨끗한 침대에 누웠다가 하루에 한두 번씩 덥고 깨끗한 물로 목욕을 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 딸에게 제 생일날 사주지 못한 빌로드 바지를 사주고, 아내에게는 비하이브 털실 한 폰드 반을 사 주고 싶다. 그리고 내 것으로 점잖고 사뜻한 넥탁이를 몇 개 사고 싶다. 돈이 없어서 적조해진 친구들을 우리 집에 청하고 싶다. 아내는 신이 나서 도마질을 할 것이다. 나는 오만 원, 아니 십만 원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생기는 생활을 기장 사랑한다. 나는 나의 시간과 기운을 다 팔아 버리지 않고, 나의 마지막 십분지 일이라도 남겨서 자유와 한..
이성부 - 시(詩)에 대하여 열 살짜리 둘째 딸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아빠, 시(詩) 좀 가르쳐 줘, 시(詩)가 무어야?" 그 천진스런 입과 눈망울에 대고 나는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나는 그것이 너를 꿈나라로 데려가고 네 동무를 사랑하고 너를 함박꽃 웃음 속에 두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나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평화라는 것을 알릴 수가 없다 갈보가 돼버린 시(詩)를 어디 가서 찾으랴! 이미 아편쟁이가 된 언어를 어디 무슨 마이신 무슨 살풀이 무슨 중성자탄으로 다시 살리고 또 죽일 수가 있으랴! 이미 약속을 저버리기로 한 언어 이미 저를 시궁창 쓰레기통에 처박아둔 지 오래인 언어 이미 저를 몸 째로 팔아버린 언어 어디 가서 다시 찾을 수가 있으랴! 무슨 아프리카 무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도 어찌 그것을 다시 ..
규중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 '규중칠우쟁론기'는 어느 규중 부인이 지은 것으로, 고대 수필 형식의 글입니다. 의인법, 풍유법, 내간체의 표현을 빌어 풍자적이고 우화적으로 인물의 성격을 뚜렷하게 묘사하며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여인들의 삶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조침문(弔針文)과 함께 의인화된 고대 수필의 쌍벽을 이루며 규방의 부인이 침선(針線)에 사용하는 도구들을 등장시켜 인간 세상의 처세술에 견주어 이를 풍자하고자 한 것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고 공치사만 일삼는 세태에 대한 풍자가 주제이며, 규방의 부인이 자(척부인), 바늘(세요각시), 가위(교두각시), 실(청홍흑백각시), 골무(감토할미), 인두(인화부인), 울낭화(다리미) 등 규중 칠우가 제각기 자기의 공을 내세우며 다투다가 규방 주인의 책망을 듣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규중 ..
류달영 - 슬픔에 관하여 사람의 인생은 기쁨과 슬픔을 경위(經緯)로 하여 짜가는 한 조각의 비단일 것 같다. 기쁨만으로 인생을 보내는 사람도 없고, 슬픔만으로 평생을 지내는 사람도 없다. 기쁘기만 한 듯이 보내는 사람도 없고, 슬픔만으로 평생을 지내는 사람도 없다. 기쁘기만 한 듯이 보이는 사람의 흉중에도 슬픔이 깃들이며, 슬프게만 보이는 사람의 눈에도 기쁜 웃음이 빛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기쁘다 해서 그것에만 도취 될 것도 아니며, 슬프다 해서 절망만 일삼을 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내 책상 앞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고 있다. 고흐가 그린 ≪들에서 돌아오는 농가족≫(農家族)이다.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이 얇게 무늬지고, 넓은 들에는 추수할 곡식이 그득한데 젊은 아내는 바구니를 든 채 나귀를 타고, 남편인 농부는 포크를..
당세풍(當世風)의 결혼 -마광수 여러 해 동안 내 마음은 흔들려 왔다 겁 많은 희망도 옹졸한 절망도 만나왔다 한껏 명목(名目)뿐인 죽음과도 만나왔다 이젠 힘주어 시끄럽게 짖어도 보겠다 허우적허우적 신나게 춤도 추어보겠다 오묘한 생활의 섭리도 밤의 진리도 만나보겠다 안도(安堵)도 단란(團欒)도 만나보겠다 이젠 사치스런 반항도 폭음도 없다 대견스런 사주팔자(四柱八字) 과로한 아부(阿附)의 순간들만 있다 곧 쓰러지게 되리라 모든 습관처럼 본능처럼 잠깐은 신났던 저번(這番)의 사랑처럼 행복으로 빛나던 짧은 예감(豫感)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