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글

(45)
김광섭 - 세상 오래 살고 죽거나 젊어서 죽거나 흰 구름 한 점 더하지 않기는 마찬가질세 다만 착하게 사는 것이 문제지 미신(未信)이라도 진심이면 종교가 되네 천사를 기다리거든 천의(天衣) 닿도록 대문 앞이나 고이 쓸게 장미가 아니라도 꽃의 정신을 사랑하면 첫 새벽 신의(神意) 꽃잎에 머문 자국이 보이네 비애가 있는 곳이 성지(聖地)가 된다네 억(億)이 아니면 측량할 수 없는 배금(拜金) 어느새 인간과 주체가 바꿔졌네 같이 살 세상으로 알고 세운 것이지만 그저 산(山)처럼 보고 지나세 산(山)은 자유요 바람이요 고욜세 커서 좋고 깊어서 더욱 좋네 ♬ 남택상 - Twilight At The River Side
김광균 - 노신(魯迅) 시(詩)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기적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것의 베갯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지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오장(五臟)을 씻어 내린다 노신(魯迅)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 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上海) 호마로(胡馬路)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어린다 여기 하나의 상심한 사람이 있다 여기 하나의 굳세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 ♬ 남택상 - Melancholy Smile
김광규 - 어린 게의 죽음 어미를 따라 붙잡힌 어린 게 한 마리 큰 게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할 때 게 장수의 구럭을 빠져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개펄에서 숨바꼭질하던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눈을 세워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 Fariborz Lachini – Childhood
기형도 -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어둡고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기타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양초를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 David ..
곽재구 - 사평역(沙平驛)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
고정희 - 묵상 잔설이 분분한 겨울 아침에 출근 버스에 기대앉아 그대 계신 쪽이거니 시선을 보내면 언제나 적막한 산천이 거기 놓여 있습니다 고향처럼 머나먼 곳을 향하여 차는 달리고 또 달립니다 나와 엇갈리는 수십 개의 들길이 무심하라 무심하라 고함치기도 하고 차와 엇갈리는 수만 가닥 바람이 떠나라 떠나거라 떠나거라… 차창에 하얀 성에를 끼웁니다 나는 가까스로 성에를 긁어내고 다시 당신 오는 쪽이거니 가슴을 열면 언제나 거기 끝 모를 쓸쓸함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운무에 가리운 나지막한 야산들이 희미한 햇빛에 습기 말리는 아침 무막한 슬픔으로 비어 있는 저 들판이 내게 오는 당신 마음 같아서 나는 왠지 눈물이 납니다 ♬ Claude Ciari - Amsterdam Sur Eau
고두현 - 해금에 기대어 그리움 깊은 밤엔 해금을 듣습니다. 바다 먼 물소리에 천근의 추를 달아 끝없이 출렁이는 슬픔의 깊이 재고 또 잽니다. 유난히 풍랑 많고 한류 찬 물밑 길 상처에 소금 적시며 걸어온 그대 물살 센 한 생애가 이토록 쿵쾅이며 물굽이 쳐 아픕니다 ♬ 슬기둥 - 그 저녁 무렵부터 새벽이 오기까지 (정수년 선생님 해금 연주)
강은교 -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의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Michael Hoppe - Moon Ghost Walt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