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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시(詩)

황지우 - 수은등 아래 벚꽃

 

 

 

 

 

 

 

 

 

 

 

사직공원(社稷公園) 비탈길

벚꽃이 필 때면

나는 아팠다

견디기 위해

도취했다

피안(彼岸)에서 이쪽으로 터져 나온 꽃들이

수은등을 받고 있을 때 그 아래에선

어떤 죄악도 아름다워

아무나 붙잡고 입 맞추고 싶고

깬 소주병으로 긋고 싶은 봄밤이었다

 

사춘기 때 수음(手淫) 직후의 그

죽어버리고 싶은 죄의식처럼

그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던 죄처럼

벚꽃이 추악하게 다 졌을 때

나는 나의 생(生)이 이렇게 될 줄

그때 이미 다 알았다

 

이제는 그 살의의 빛

그 죄마저 부럽고 그립다

이젠 나를 떠나라고 말한

오직 축하해주고 싶은

늦은 사랑을

바래다주고 오는 길에서

나는 비로소

이번 생(生)을 눈부시게 했던

벚꽃들 사이 수은등을 올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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