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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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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 묵상 잔설이 분분한 겨울 아침에 출근 버스에 기대앉아 그대 계신 쪽이거니 시선을 보내면 언제나 적막한 산천이 거기 놓여 있습니다 고향처럼 머나먼 곳을 향하여 차는 달리고 또 달립니다 나와 엇갈리는 수십 개의 들길이 무심하라 무심하라 고함치기도 하고 차와 엇갈리는 수만 가닥 바람이 떠나라 떠나거라 떠나거라… 차창에 하얀 성에를 끼웁니다 나는 가까스로 성에를 긁어내고 다시 당신 오는 쪽이거니 가슴을 열면 언제나 거기 끝 모를 쓸쓸함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운무에 가리운 나지막한 야산들이 희미한 햇빛에 습기 말리는 아침 무막한 슬픔으로 비어 있는 저 들판이 내게 오는 당신 마음 같아서 나는 왠지 눈물이 납니다 ♬ Claude Ciari - Amsterdam Sur Eau
고두현 - 해금에 기대어 그리움 깊은 밤엔 해금을 듣습니다. 바다 먼 물소리에 천근의 추를 달아 끝없이 출렁이는 슬픔의 깊이 재고 또 잽니다. 유난히 풍랑 많고 한류 찬 물밑 길 상처에 소금 적시며 걸어온 그대 물살 센 한 생애가 이토록 쿵쾅이며 물굽이 쳐 아픕니다 ♬ 슬기둥 - 그 저녁 무렵부터 새벽이 오기까지 (정수년 선생님 해금 연주)
강은교 -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의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Michael Hoppe - Moon Ghost Waltz
[현대시조] 이호우 - 달밤 ✾ 달밤 - 이호우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 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낯익은 풍경이되 달 아래 고쳐 보니 돌아올 기약 없는 먼 길이나 떠나온 듯 뒤지는 들과 산들이 돌아 뵙니다 아득히 그림 속에 정화(淨化)된 초가집들 할머니 조웅전(趙雄傳)에 잠들던 그날 밤도 할버진 율(律)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니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쉬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 ▸ Chris Spheeris - Always
문현미 - 겨울 산 절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달을 정수리에 이고 가부좌 틀면 수묵화 한 점 덩그러니 영하의 묵언수행! 폭포는 성대를 절단하고 무욕의 은빛 기둥을 곧추세운다 온몸이 빈 몸의 만월이다 ♬ André Rieu - When Winter Comes
김종철 - 섬진강 추석에 내려왔다 추수 끝내고 서울 가는 아우야 동구 단풍 물든 정자나무 아래 -차비나 혀라 -있어요 어머니 철 지난 옷 속에서 꼬깃꼬깃 몇 푼 쥐여주는 소나무 껍질 같은 어머니 손길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 고개 숙여 텅 빈 들길 터벅터벅 걸어가는 아우야 서울 길 삼등열차 동구 정자나무잎 바람에 날리는 쓸쓸한 고향마을 어머니 모습 스치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어머니 어머니 부를 아우야 찬 서리 내린 겨울 아침 손에 쩍쩍 달라붙는 철근을 일으키며 공사판 모닥불가에 몸 돌리며 앉아 불을 쬐니 팔리지 않고 서 있던 앞산 붉은 감들이 눈에 선하다고 불길 속에 선하다고 고향마을 떠나올 때 어여가 어여가 어머니 손길이랑 눈에 선하다고 강 건너 콩동이랑 들판 나락 가마니랑 누가 다 져날랐는지요 아버님 불효자식 올림이라..
박우현 - 한 세월 세월이 어떻게 가던가 울면서 가던가 웃으면서 가던가 손 흔들며 가던가 꽃상여처럼 가던가 세월은 어떻게 가던가 4월 바람에 지던 벚꽃처럼 가던가 여름 소나기처럼 가던가 가을 햇살에 흔들리던 억새처럼 가던가 겨울 살을 에는 눈바람으로 가던가 세월은 또 어떻게 가던가 사막 모래바람 같은 한숨 소리로 가던가 첫키스처럼 가던가 되돌아 갈 수 없는 추억처럼 가던가 한 세월이… 갔다. ♬ Igor Dvurechensky - Winter Feelings
최홍걸 - 겨울나무 마침내 빈 몸이 되었다. 생각마저 비었으니 저 어둠으로 흐르는 강 수이 건널 수 있겠다 그리운 사람아 저 언덕에 이르면 그대 길 위에 환한 등불 하나 밝힐 수 있겠다 ♬ 이성원 - 겨울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