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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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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龍山)에서 -오규원 시(詩)에는 무슨 근사한 얘기가 있다고 믿는 낡은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 시(詩)에는 아무것도 없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생(生)밖에 믿고 싶어 못 버리는 사람들의 무슨 근사한 이야기의 환상(幻想)밖에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의지(意志)와 이상(理想) 속에 자라며 흔들리듯 그대의 사랑도 믿음도 나의 사기(詐欺)도 사기의 확실함도 확실한 만큼 그만큼 확실하지 않고 근사한 풀밭에는 잡초가 자란다 확실하지 않음이나 사랑하는 게 어떤가 시(詩에)는 아무것도 없다. 시(詩에)는 남아 있는 우리의 생(生밖)에 남아 있는 우리의 생(生)은 늘 우리와 만난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믿고 싶지 않겠지만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 1978 문학과 지성사, 『왕자(王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에서)
봄날은 간다 -조은산 화무(花無)는 십일홍(十日紅)이여 달이 차면 기울 듯 봄꽃의 향연도 여기까지인가? 눈발처럼 흩날리는 꽃잎 하루만 한눈 팔아도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꽃이 질 때 아쉬운 건 인생처럼 절정의 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 꽃이 지듯 그 화려한 봄날은 간다 속절없이 떨어지는 봄꽃이 아쉬울 때 가슴이 아프다 인생처럼 계절은 또 그렇게 가고 오는데 그대도 가는 게 슬픈가?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 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어둠 속에서 -조지훈 어두운 세상에 부질없는 이름이 반딧불같이 반짝이는 게 싫다 불을 켜야 한다. 내가 숨어서 살기 위해서라도 불은 켜져야 한다 찬란한 빛 속에 자취도 없이 사라질 수는 없느냐 아니면 빛이 묻은 칼로라도 나를 짓이겨다오 불을 켜도 도무지 밝지를 않다 안개가 자욱한 탓인지…… 화투불을 놓아도 횃불을 들어도 먼 곳에서는 한점 호롱불이다 저마다 가슴이 터져 목숨을 태우고 있건만 종소리처럼 울려 갈 수 없는 빛이 서럽구나 닭이 울면 새벽이 온다는데 무슨 놈의 닭은 초저녁부터 울어도 밤은 길기만 하고ㅡ 천지(天地)가 무너질 듯 소름끼치는 백귀야행(百鬼夜行)의 어둠의 거리를 개도 짖지 않는다 명백(明白)한 일이 하나도 없으면 땅이 도는 게 아니라 하늘이 도는 게지 죽어 버리고 싶은 마음을 달래어 죽기 싫은 마음이 미칠 ..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유치환 고독은 욕되지 않으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그렇게 요조(窈窕)ㅎ던 빛깔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깡그리 거두어 간 기술사(奇術師)의 모자 앙상한 공허만이 먼 한천(寒天) 끝까지 잇닿아 있어 차라리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에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에 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라 들어 보라 이 거짓의 거리에서 숨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