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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시(詩)

어둠 속에서 -조지훈

 

 

 

 

 

 

 

 

 

 

 

어두운 세상에

부질없는 이름이

반딧불같이 반짝이는 게 싫다

 

불을 켜야 한다.

내가 숨어서 살기 위해서라도

불은 켜져야 한다

 

찬란한 빛 속에

자취도 없이 사라질 수는 없느냐

아니면 빛이 묻은 칼로라도 나를 짓이겨다오

 

불을 켜도 도무지 밝지를 않다

안개가 자욱한 탓인지……

화투불을 놓아도 횃불을 들어도

먼 곳에서는 한점 호롱불이다

 

저마다 가슴이 터져 목숨을 태우고 있건만

종소리처럼 울려 갈 수 없는 빛이 서럽구나

 

닭이 울면 새벽이 온다는데

무슨 놈의 닭은

초저녁부터 울어도 밤은 길기만 하고ㅡ

 

천지(天地)가 무너질 듯 소름끼치는

백귀야행(百鬼夜行)의 어둠의 거리를

개도 짖지 않는다

 

명백(明白)한 일이 하나도 없으면

땅이 도는 게 아니라 하늘이 도는 게지

죽어 버리고 싶은 마음을 달래어

죽기 싫은 마음이 미칠 것 같다

 

어둠을 따라 행길로 나선다

어둠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찢어진 풀벌레같이 떨고 있다

 

가냘픈 손가락을 권총(券銃)처럼 심장(心腸)에 겨누고

가난한 피를 조금씩 흘리면서 나는 가야 한다

내가 나의 빛이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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