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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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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 겨울 바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허무(虛無)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靈魂)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 『겨울바다』 1967 상아출판사 ♬ 사랑과 평화 - 겨울 바다
박노해 - 겨울 사랑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듯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눈보라 치는 겨울 밤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내 언 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듯한 방을 고마워하고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 김세화 & 이영식 - 겨울 이야기
안도현 - 겨울 강가에서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내리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아내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 김용택 『시가 내게로 왔다: 김용택이 사랑하는 시』에서 ♬ Al Di Meola - First Snow
황지우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Ke..
겨울 강가에서 - 김경미 눈과 함께 쏟아지는 저 송곳니들의 말을 잘 들어두거라 딸아 언 강 밑을 흐르며 모진 바위 둥글리는 저 물살도 네 가슴 가장 여린 살결에 깊이 옮겨두거라 손발 없는 물고기들이 지느러미 하나로도 어떻게 길을 내는지 딸아 기다림은 이제 행복이 아니니 오지 않는 것은 가서 가져와야 하고 빼앗긴 것들이 제 발로 돌아오는 법이란 없으니 네가 몸소 가지러 갈 때 이 세상에 닿지 않는 곳이란 없으리 -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쓰랴? 1989년
마종기 - 눈 오는 날의 미사 하늘에 사는 흰옷 입은 하느님과 그 아들의 순한 입김과 내게는 아직도 느껴지다 말다 하는 하느님의 혼까지 함께 섞여서 겨울 아침 한정 없이 눈이 되어 내린다 그 눈송이 받아 입술을 적신다 가장 아름다운 모형의 물이 오래 비어 있던 나를 채운다 사방에 에워싸는 하느님의 체온 땅에까지 내려오는 겸손한 무너짐 눈 내리는 아침은 희고 따뜻하다
이성부 - 시(詩)에 대하여 열 살짜리 둘째 딸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아빠, 시(詩) 좀 가르쳐 줘, 시(詩)가 무어야?" 그 천진스런 입과 눈망울에 대고 나는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나는 그것이 너를 꿈나라로 데려가고 네 동무를 사랑하고 너를 함박꽃 웃음 속에 두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나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평화라는 것을 알릴 수가 없다 갈보가 돼버린 시(詩)를 어디 가서 찾으랴! 이미 아편쟁이가 된 언어를 어디 무슨 마이신 무슨 살풀이 무슨 중성자탄으로 다시 살리고 또 죽일 수가 있으랴! 이미 약속을 저버리기로 한 언어 이미 저를 시궁창 쓰레기통에 처박아둔 지 오래인 언어 이미 저를 몸 째로 팔아버린 언어 어디 가서 다시 찾을 수가 있으랴! 무슨 아프리카 무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도 어찌 그것을 다시 ..
당세풍(當世風)의 결혼 -마광수 여러 해 동안 내 마음은 흔들려 왔다 겁 많은 희망도 옹졸한 절망도 만나왔다 한껏 명목(名目)뿐인 죽음과도 만나왔다 이젠 힘주어 시끄럽게 짖어도 보겠다 허우적허우적 신나게 춤도 추어보겠다 오묘한 생활의 섭리도 밤의 진리도 만나보겠다 안도(安堵)도 단란(團欒)도 만나보겠다 이젠 사치스런 반항도 폭음도 없다 대견스런 사주팔자(四柱八字) 과로한 아부(阿附)의 순간들만 있다 곧 쓰러지게 되리라 모든 습관처럼 본능처럼 잠깐은 신났던 저번(這番)의 사랑처럼 행복으로 빛나던 짧은 예감(豫感)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