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는 평양이 고향인 분이십니다.
1·4후퇴 때 남하하셨는데,
그땐 우리 남쪽도 못살 때라
구박과 설움이 엄청났다고 합니다.
김일성 종합대학까지 마치셨지만
국제시장에서 구두닦이부터 시작하셔서
하야리야 부대에서 잡심부름도 하셨고
어깨 너머로 영어와 운전을 독학하시다가
돈이 좀 모아지자 무작정
1평짜리 사무실을 얻어 오퍼상으로
외국을 다니셨다 합니다.
경남 고성 엄청난 갑부 박씨 집안
무남독녀로 자란 내 어머니는
당시 여성으로서 이름도 갖지 못할 때에
할아버지가 이름도 지어 주시고
양친 딸려서 세 살 때 일본으로 가셨습니다.
여고를 졸업하고 귀국하니
일본에선 '조센징', 조국에서 '쪽바리'라며
엄청나게 왕따 당하며 사셨다 합니다.
해가 지면 북녘땅 바라보시며
그렇게 서럽게 우시던 아버지와
일본에서 조국에서 왕따 당하며
악몽에 시달리시던 어머니를
우리 자식들은 다 보며 자랐답니다.
그래서 전 유달리
북한과 일본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3대째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신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용서'에 대한 화두를
일찍이 우리 자식들에게 설파하시곤 하셨습니다.
미워하면 결국 자신만 상처받는다는 거였죠.
아버지는 제가 스물여섯 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2019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타고난 성격 자체가
성(性) 역할이 바뀌지 않았나 싶을 만큼
어머니는 강하고 엄하셨으며
아버지는 여리고 한없이 자상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학교 업무밖에 할 줄 몰랐지만
아버지는 우리를 키우시고
집안일 다 하시며 못 하는 게 없으셨죠.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서점에 가고, 극장에 가고, 레코드판을 사고,
가족사진을 찍고, 외식을 하고, 여행을 했습니다.
여름엔 구정 뜨개실로 런닝을 떠서
풀하여 우리에게 입히시고,
겨울엔 모헤어 털실로 외투랑 목도리를 떠서
우리에게 입히셨습니다.
항상 우리와 깊은 대화를 나누셨고,
자식들 학교 문제 상담도 해 주시곤 하셨죠.
그래서 전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고향'이란 단어와 동격인 단어를 연상하자면
'아버지'란 단어가 떠오릅니다.
그런 아버지가 세상에서 물러가신 지
서른일홉 해가 되었네요.
막상 가시던 날의 슬픔은 없었고
그 뒤로도 한참…
아이 아빠가 세상에서 떠난 뒤부터
그제야 울음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 아빠가 아니라
내 아버지가 세상에 안 계심을
그제야 문득 느끼고는……
지금보다 나이 적었을 땐
아버지가 가신 8월에
아버지가 그렇게 그립더니
나이 드니 시린 계절이면
아버지 생각이 그렇게 납니다.
▒ 1995년 겨울의 일기
오늘은 시간이 무한히 흘러가도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
난 이따금 우울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내가 싫다.
많이도 겪고, 이젠 산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도 희망을 꿈꾸고, 소스라치게 놀래고, 때론 행복해 하는…
나 자신과 싸운다는 것이 어쩜 벽면 좌선과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을 달래는 짓거리에 신물이 날만도 하련만…
아버지 생각이 나면서 가슴 한가운데로 바람이 지나간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란 어떤 삶을 뜻하는지 난 몰랐었다.
그땐…
그쯤이면 어차피 다 죽은 모습인데 왜 그렇게 오래 더 고통을 당해야 하셨는지…
인간은 태어날 때도 그리 고생을 해야 하고, 살면서도 고생을 하는데, 죽을 때까지도 그렇게 고생을 하며 죽어야 하는지, 삶의 고달픔이 진하게 느껴졌었다.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옮겨가기도 그토록 힘들고 어려운 것이다.
어릴 때 쥐약을 먹은 개가 몸 안에서 일어나는 고통 때문에 사방으로 미칠 듯이 뛰어다니다 결국 골목에 쓰러져 헐떡이며 너무나도 서서히 외롭게 죽어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사람의 죽음은 뭔가 달라야만 한다.
그러나 사람의 죽음 역시 혼자만의 힘겹고 고독하고 지리한 싸움이었다.
어디서도 들리던 숨이 가빠 헐떡이던 소리를 더 이상 버텨낼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고통스런 숨소리에 내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오직 목에만 숨이 걸려 있었다.
신체의 어느 부위도 살아 있지 않았다.
그 공간을 살며시 빠져나와 시장으로 갔다.
내 영혼과 심장을 짓이겨 놓을 것 같은 그 헐떡이던 숨소리에서 놓여나고 싶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생명력이 힘차게 꿈틀거리고 있는 시장이었다.
이런 풍경들과는 대조적으로 죽음이란 얼마나 음울하고 기이하고 진저리치도록 괴로운 형벌인가.
병실에서 날 향해 손짓하던 아버지의 가냘픈 손이 내려질 때, 나의 아버지임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멋진 백발의 머리가 윤기를 잃고 있었다.
날 보고 웃던 두 눈은 여느 때보다 움푹 들어갔고, 양 볼가 깊게 패인 주름 앞에서 난 정신이
아득해 왔다.
아버지, 건장하고 든든하기만 했던 나의 아버지.
그 가슴에 기대면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아버지와 함께 금정산 비탈길을 내려오던 어느 날
"우리 공주 시집가면 옆집에서 살아야 돼." 하시며 나를 잡은 손에 꼬옥 힘을 주시더니, 앙상한 마디와 거친 피부로 변해버린 그 손과 손등의 핏줄이 유난히 푸르게 비쳐 보였다.
변함없었던 것은 따스한 체온만이 예전 그대로일 뿐이었다.
공연히 시선을 멀리 던졌었다.
가녀린 초로의 노인에게도 창 너머 오렌지빛 노을이 곱게 물들고 있었다.
황혼에 젖은 아버지의 상기된 이마에서 난 아버지의 소년을 떠올렸다.
다부진 신체에 억척스런 열정, 배짱 좋은 담력만이 전부로 아셨던 나의 아버지.
그러나 그 이면에 숨은 타인과의 치열한 경쟁, 완강함 뒤에 감춰진 나약함, 그리고 경쟁의식 속에 숨은 슬픔과 고통을 왜 그제야 눈치채야 했는지…
기력마저 쇠잔해지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아버지. 여생을 조용히 보내야 할 시간에 여러 사람이 거쳐 간 때 묻은 병실의 이부자락에 몸을 맡겨야 하는 아빠가 안쓰러웠다.
그때쯤 내가 편히 쉬고 기댈만한 받침돌이 되어야 했었다.
그 험난하고 격변한 세월을 살아오시며 아버지가 겪었던 삶의 지줏대를 그제쯤 내가 되잡아야 했었다.
아빠가 누워 계신 병상의 시트 위에 내 25년의 세월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 세월의 편린들이 조각 이불의 무늬를 짜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는 강건하던 아빠를 잃어버린 나를 향해 게실게실 웃고 있었다.
이불을 끌어다 아빠를 덮어 드리자 아빠를 받쳐드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전율처럼 다가왔다.
부모와 자식, 곧 아버지와 나의 위치가 팽팽한 대각선으로 자리 바꾸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 나 두고 가지마."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아빠의 입은 자신 있게 말했지만 내겐 여린 풀잎의 바람 스치는 소리만큼이나 희미하게 들렸다.
밥을 먹여 드린 후 설거지를 하다가 그예 참았던 눈물을 수돗가 바닥에 흩뿌리고 말았지…
어쩜 그 눈물은 아버지가 아직도 살아 계심을 인지하던 깨달음의 결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효도할 날이 내게 아직 남아 있다는 환희의 알알들이었는지도 모른다.
눈물을 흘린다는 건 아직 내 모든 것이 살아 있음일 것이다.
그건 참 좋은 것이다.
♬ 아버지와 제가 장르불문 제일 좋아하는 음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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